15세 이용(李庸+戈)은 자(字)는 언선(彦善)이고, 호는 불행히도 미상(未詳, 전하지 않는다.)이다. 간혹 인터넷 한자 폰트에 잘 나타나지 않아 오기(誤記)로 일부 문헌에서는 이용(李鏞)이나 이용(李庸), 이용(李勇) 등으로 기록될 수는 있으리라 여겨진다. 14세 병조참판 광식(光軾)과 평안도관찰사 증이조판서 정국공신 양간공 이세응(李世應)의 딸 함안이씨(咸安李氏)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533년에 태어났다 하는데 정확한 생일은 전하지 않고, 사망년월일은 1591년 1월이라 하는데 정확하지 않다. 1555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가선대부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그의 화려했던 행적에 비해 현재까지 드러난 것은 다소 단편적이다. 1581년 성박(成璞)의 후임으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부임했으며, 1583년에는 함경남도도순찰사(咸鏡南道都巡察使)에서 방어사(防禦使)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 함경남도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로 전임된 기록이 전부이다. 더욱 비극적인 사실은 경기도 과천 청계산(淸溪山) 갑좌에 있었다는 그의 묘소 위치 역시 실전되어 행방이 묘연하다는 점이다. 한때 그의 형 이감(李戡)의 4대손인 송곡 이서우(松谷 李瑞雨)가 1701년부터 1709년 임종 직전까지 과천 청계에서 거주하면서 서울과 근기지역, 그리고 서울과 지방을 왕래하는 남인 인사들과 만났다는 기록이 최근 이서우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가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송곡이 과천 청계 어디쯤에서 거처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송곡이 있던 곳이 이용의 묘소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몇 개의 단편적인 자료가 발견되어, 그의 행적을 간단하게 추적할 수 있었다. 1555년(명종 10)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가선대부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 이르렀는데 그의 정확한 관직 역임 현황이 전하지 않았다. 그의 묘비문을 호조판서 헌민공 윤탁연(尹卓然)이 지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윤탁연의 문집인 중호문집에서 이용의 묘지명(墓誌銘)이나 묘비명(墓碑銘)을 찾을 수 없었다. 윤탁연의 중호문집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찾아본 바 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용의 본처 처가인 여산송씨의 문헌 기록에서 이용의 관직 역임 현황을 찾을 수 있었다.
이용의 첫 부인 여산송씨는 동지 송맹경(宋孟璟)의 딸이라 한다. 1916년에 편찬된 여산송씨 족보의 본문 30페이지에 인번파 송맹경 부분이 나오는데, 그의 아들 송성(宋誠), 송눌(宋訥) 다음에 녀 이용, 녀 윤탁연, 녀 이삼성(李三省, 전주인)이 등장한다. 그 중 이용에 대해서는 女李 庸+戈 羽溪人兵使不育으로 나타난다. 이용이 송맹경의 맏사위였고, 자녀가 없었다는 기록이 나타났다.〈여산송씨족보 1916년판, 본문 30페이지〉 송맹경의 아버지는 송수(宋壽, 1470 ~ 1518)인데, 이용의 처조부 송수의 묘지명에서 그가 나타나며 선전관으로 되어 있다. 송수의 묘지명은 정사룡(鄭士龍)이 쓴 것으로, 송수의 부인 광주이씨가 송수의 사망(1517년 9월) 이후 38년을 더 살다가 1555년에 사망한 것이 기록되었다. 정확한 묘지문을 지은 시점은 알 수 없으나 1555년으로부터 3년 이내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용이 1555년(명종 10) 무과에 급제한 직후로부터 멀지 않은 시점의 직책은 선전관(宣傳官)이었다.〈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通訓大夫定州牧使宋公墓碣銘 幷序, 湖陰雜稿卷之七〉 송수의 묘지명은 정사룡(鄭士龍)의 문집인 호음잡고(湖陰雜稿)의 제7권에 실려 있다. 장인 송맹경의 묘갈명은 송맹경의 둘째사위이자 그의 동서, 그리고 후처의 처남이었던 헌민공 윤탁연(尹卓然)이 썼는데, 生二女長嫡刑曹正郞李庸+戈 次윤탁연 으로 등장한다.〈동지중추부사송공맹경묘갈명〉 송맹경의 첫 사위가 형조정랑 이용이고 그 다음이 윤탁연이라는 것이다. 송맹경의 사망년대는 을축 1565년 2월 7일 훈련원도정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내금위장, 오위장으로 재직 중 1565년 2월 7일 임소에서 졸서했다 한다. 3년상을 마치는 1567년에서 멀지 않은 시점에 그는 형조정랑(刑曹正郞)이었던 것이다. 본처 처가쪽의 기록을 통해 그가 1555년 이후 선전관을 역임한 것과, 1567년 선조 즉위 시점을 전후하여 형조정랑을 역임한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과거 시험 시행기록을 찾던 중 1560년 그가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별시무과 시험의 참고관(參考官) 으로 참여한 기록도 나타났다.〈가정39년 경신문무과별시방목(庚申文武科別試榜目)〉 해당 무과시험은 1560년 9월에 시행되어 10월에 발표가 난 것으로,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가 관례를 올리고 입학을 한 것을 기념해서 시행한 특별 별시무과였다.〈가정39년 경신문무과별시방목(庚申文武科別試榜目)〉
한글 유니폰트에도 잘 나타나지 않는 한자라서 이름을 표기하기 어려웠던 때문인지, 그의 이름이 나타나는 기록이 전하지를 않았다. 행여 다른 글자로 대체해서 썼을 가능성도 높은 가운데 나타난 기록이다.
이후 몇 개의 고서류 중 읍지를 확인해보았다. 조선시대에는 각 왕별로, 새로 국왕이 즉위한 직후에 전국에 명령을 내려 각 지역마다 읍지상송령을 내려서 지역의 현황, 특산물, 지리, 지형, 지물, 인구수 등에 대한 기록을 읍지에 적어서 조정에 보고한다. 따라서 몇 개의 읍지에 지방관으로 그가 나올수 있지 않았을까 하여 읍지들의 선생안(先生案)과 관안(官案)을 찾아본 결과 몇 개의 행적을 더 더듬어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강계부사(江啓府使), 길주목사(吉州牧使),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咸鏡北道兵馬水軍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지금까지 확인된 직책은 이 것으로, 차후 추가적으로 다른 관직을 지낸 것도 찾을 가능성이 있음을 미리 언급하고자 한다.
강계지에는 읍선생안에 이용 갑술 정월래 을해 11월거 로 되어 있다. 1574년 1월에 강계부사로 도임하여 1575년 11월에 체직된 것이다. 전임자인 이이수(李臣+頁壽)가 체직된 것은 갑술 정월 피논거로 되어 있다.〈강계읍지〉 한성에서 평안북도 강계군까지 거리가 있다. 1573년 12월 말이나 1574년 1월 초 시점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을 것이다. 길주읍지에는 선생안에 이용 경진년 윤4월래 11월체 로 되어 있다. 길주목사로는 1580년 4월에 부임하여 11월에 체직된 것으로 되어 있다.〈길주목읍지〉 임명은 1580년 3월 시점이었을 것이다.
1582년 2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는데, 이용 임오 2월래 동년 8월이체 率京妾高山察訪狀 啓奪告身. 이라 한다.<경성부읍지> 경성부읍지에는 부임과 이임 사연이 상세하게 적혀있다. 함경북도 북병사는 경성부사(鏡城府使)직을 겸직한다.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있었지만, 서울에 첩을 거느린 사실이 있어서 고산찰방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한다.<경성부읍지> 이상 확인된 기록으로는 선조 때에도 1574년 1월~11월은 강계부사, 1580년 2월~8월은 길주목사로 재직했다.
그밖에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선생안에도 그의 이름이 나타나 있다.〈촉영도선생안(矗營道先生案)〉 그런데 경상우병영 읍지에는 도임, 이임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1565년 이후 1574년 이전, 혹은 선조 즉위 이후 1574년 이전의 어느 시점에 그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한 것 같다.〈촉영도선생안(矗營道先生案)〉
이후 1581년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전라좌수사로 부임했다가 1582년의 어느 시점에 함경남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었다가 1583년 이탕개의 난 발생 시점에 방어사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된 것이다. 전라좌수사 부임 시 전임자 성박의 말을 믿고 이순신을 미워하여 이순신의 인사고과를 낮게 평가했다가 전라도 도사 조헌의 항의를 받았고, 한편 이순신을 겪어보면서 그의 인품에 탄복한 그는 후일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재직 시 자신의 군관으로 이순신을 추천한다. 전라좌수사 때 성박이 이용에게 이순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남긴 것은 자신의 허락 없이 병영의 오동나무를 벤 사건 때문이었다. 1583년 1월에 이용은 자신의 군관, 함경남도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이순신을 천거하여 그를 임명시켰고, 자신의 군관으로 데리고 있다가 이순신은 그해 8월 남병영에서 멀지 않은 건원보의 권관으로 가게 된다.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그가 어느 시점에 어떤 직책을 역임했는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인천부읍지와 인천읍지를 현대에 한글로 번역한 책이 있어서, 확인해본 결과
역주 인천부읍지(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2004) 59페이지에
105. 가선대부 이 용 309) 정해년 7월 29일 전직 병사로 있다 와서 무자년(1588) 6월 28일 사간원의 계청으로 파직됨 276페이지의 주해에는 309) 이용( 李庸) : 도순찰사 방어사를 지냈다 로 되어 있다.
역주 인천부읍지 59페이지 선생안을 보니 1587년 7월 29일 이용은 인천부사로 부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어 이듬해 눈병, 안질환으로 앞을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승정원의 건의로 면직된 것이 선조실록에 등장한다.
선조실록 22권, 선조 21년 6월 29일 신사 2번째기사 1588년 명 만력(萬曆) 16년 양사가 신사정의 일을 논하고 인천 부사 이용은 눈이 어둡다며 파직을 청하다. 양사가 신사정의 일을 또 아뢰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인천 부사(仁川府使) 이용(李庸)은 눈이 어두워 사물(事物)을 볼 수 없으니 파직하라고 아뢰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兩司前啓申士楨事, 答曰, 不允。 仁川府使李庸+戈不視物, 請罷, 答曰: "依啓。"〈선조실록, 22권, 선조 21년 6월 29일 신사 2번째기사〉
선조실록 22권, 선조 21년 6월 29일의 2번째 기사에 눈이 어둡다는 이유로 양사의 계로 파직된 기록이 등장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이용(李庸+戈)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1555년 무과 급제 선전관 역임〈호음잡고, 송수 묘지문〉 1560년 형조좌랑으로 재직 중 무과의 시험감독관 1567년 형조정랑〈중호문집 중 동지중추부사 송맹경 묘지명〉 1574년 1월~11월 강계부사〈강계부읍지〉 ?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이때 이미 품계는 가선대부〈촉영도선생안〉 1580년 2월~8월 길주목사〈길주목읍지〉 1581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난중일기 및 이순신 관련 자료〉 1582년 2월~8월 함경북도병마절도사 겸 경성부사〈경성부읍지〉 1582년 8월 첩을 솔축한 것을 이유로 고산찰방의 탄핵을 받아 면직되고, 고신을 박탈당함〈경성부읍지〉 1582년의 어느 시점에 함경남도 도체찰사 1583년 이탕개의 난 전후로 함경남도 방어사에 임명되었다가 며칠 뒤 남도병마절도사로 교체임명됨 1587년 7월 29일 인천부사 부임〈인천부읍지〉 1588년 6월 28일 눈이 어둡다는 이유로 양사의 논계를 받고 면직됨〈선조실록〉
첫 부인은 정부인 여산송씨(貞夫人 礪山宋氏)로 동지 송맹경의 딸이며, 목사 송수의 손녀이다. 동지 송맹경은 광주이씨 광원군 이극돈(李克敦)의 외손자이다. 여산송씨부인의 생몰년월일은 미상이며 자녀가 없었다. 첫 부인 여산송씨의 여동생의 남편, 손아랫동서가 헌민공 윤탁연이다. 두 번째 부인은 정부인 칠원윤씨(貞夫人漆原尹氏)로 현령 증 영의정 귀원부원군 윤이(龜原府院君尹伊)의 딸이다. 첫 결혼에서 첫부인의 처제의 남편이었던 윤탁연의 집안이다. 윤이의 딸 칠원윤씨에게서는 자녀를 몇 명을 두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세 번째는 첩으로 경성부읍지에 간략하게 언급된, 그가 한성에 첩을 솔축한 일로 인해 파직을 불러오게 한 여인이다. 솔축이란 일반인 첩을 둔 것이 아니라 공노비나 관노비를 첩으로 삼은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 첩에게서 몇 명의 자녀를 두었는가까지는 알려지진 바가 없다.
1555년 무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에 이르기까지 그는 36년간 진중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두 정실부인에게서 자녀를 보지 못하고 후사가 끊어진데다가, 재조명의 기회도 없었고, 더욱이 한자 조차도 이름을 찾기 힘든 쉽지 않은 한자이다보니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이후 1591년 1월에 사망하였으며, 과천 청계산 갑좌에 매장되었는데 과천 청계산 주변은 행정구역이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에도 편입되었다가 과천군 동면으로도 편입되는 등 행정구역상의 변화가 심한 편이었다. 이 부분은 구 광주군 관련 문헌이나 구 과천군 관련 문헌을 추가로 확인해봐야 될 것으로 보인다. 그의 묘갈명은 헌민공 윤탁연이 썼는데, 불행히도 윤탁연이 쓴 이용 묘갈명은 윤탁연의 문집인 중호문집(重湖文集)에도 전하지 않고 해당 문중에 헌민공이 쓴 글들이 따로 있었을까 싶어 문의해보았으나 확인이 되지 않았다.
참고. 〈호음잡고, 송수 묘지문〉,〈중호문집 중 동지중추부사 송맹경 묘지명〉, 〈강계부읍지〉,〈촉영도선생안〉,〈길주목읍지〉, 〈경성부읍지〉,〈인천부읍지〉,〈선조실록〉, 〈가정39년 경신문무과별시방목(庚申文武科別試榜目)〉